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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매춘·복수 ‘슬픈 필리핀’[경향신문 2007.04.27]
 Asia  | 2007·04·27 16:32 | HIT : 4,422 | VOTE : 907 |
[문학]식민지·매춘·복수 ‘슬픈 필리핀’

▲에르미따…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아시아

우리가 가진 ‘필리핀’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마르코스 독재와 이멜다의 구두, 그리고 한국으로 시집온 필리핀 여성과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비참한 노동자들이다. 그밖에 필리핀의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필리핀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호세의 대표작 ‘에르미따’(1988년작)가 지금 와서야 번역된 것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 및 근대화 과정에서 비슷한 상처를 지닌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4년생으로 올해 83세인 호세는 의학을 전공하다가 필리핀 민족주의자이자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의 영향을 받아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며 언론인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가 1965년 창간한 잡지 ‘솔리다리다드’(연대)는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판금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은 스페인·미국·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마르코스 독재로 이어지는 필리핀 현대사를 22년(62~84년) 동안 써내려간 대작 ‘로살레스 사가’(5권)가 꼽히지만 작품성과 함께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이번에 나온 ‘에르미따’이다.

‘에르미따’는 여주인공인 창녀의 이름이면서 수도 마닐라의 대표적 환락가의 이름이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필리핀 지배 계층과 외국인들의 호화주택가였다가 1945년 미군이 필리핀을 탈환하면서 폐허가 됐으나 60~70년대 개발시대를 거치며 환락과 유흥의 중심지가 됐다. 최근에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매춘관광이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필리핀의 국민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주인공 에르미따 로호의 삶은 필리핀 현대사와 평행선을 그린다. 그의 가계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형성된 부유한 메스티소(스페인계 혼혈)이다. 로호 집안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친미파로 변신한다. 에르미따의 할아버지는 두 딸과 아들을 뒀는데 맏딸 펠리치타는 미군 총사령관의 정부 출신으로 사교계를 주름잡고 아들 호셀리토는 미군에 입대했다가 독재정권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둘째딸 콘치타는 일본군 병사에게 강간당한 뒤 비밀리에 사생아를 낳고 미군과 결혼해 필리핀을 떠나는데 그 사생아가 바로 에르미따이다.

집안의 수치가 된 에르미따는 로호 집안의 운전기사인 아르투로 가족의 일원으로 살게 되며 자신을 방기한 집안에 대한 복수를 위해 고급 요정 카마린에 발을 들인다. 거기서 그는 자기 환멸에 빠진 전직 역사학자 롤란도 크루즈를 만나고 동남아시아 정치 거물을 시작으로 상원의원 언론재벌 장군 등을 거치면서 어머니와 이모, 삼촌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다. 그러나 목표를 상실한 뒤 공허감에 휩싸인 에르미따는 롤란도의 구애를 뿌리치고 미국으로 떠나지만 그의 권총자살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수도원을 찾는다.

출간에 맞춰 지난 25일 한국에 온 작가 호세는 “대중의 관심을 끌고 싶어 매춘부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선정적인 부분은 거의 없어 그것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세계적으로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소설을 한물 간 것으로 여기는 경향”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50년대부터 한국을 오가면서 장준하·김준엽·한무숙 등과 교류했던 그는 한국인 재미학자를 며느리로 두고 있다. 부희령 옮김. 13000원

글 한윤정·사진 이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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